제16장

강정우는 야구 방망이를 든 채 남자의 얼굴을 툭툭 치며 으름장을 놓았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중요한 것만 말해!”

남자는 몇 번 몸을 떨더니 입을 열었다.

“옷차림이 아주 세련된 아가씨였어요. 저희는 옆모습밖에 못 봤는데, 아주 마르고 허리까지 오는 긴 웨이브 머리에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었어요. 그 여자가 저희 삼 형제에게 현금으로 1900만 원을 주면서, 보화로에서 기다리다가 예쁜 여자가 나타나면 덮치라고 했어요. 성공하면 1900만 원을 더 준다고 했고요. 제가 아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제발 때리지 마세요, 형님.”

다른 한 명의 불량배도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 채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이라고 말했다.

강태준의 마음속에 차가운 저릿함이 피어올랐다. 그녀가 무사해서 천만다행이었다. 김지연이 하마터면 이 세 명의 쓰레기들에게 짓밟힐 뻔했다는 생각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이 밀려왔다.

단서는 여기서 끊겼다. 만약 계좌로 돈을 보냈다면 추적이라도 해볼 텐데, 상대방도 신중하게 현금으로 거래한 것이다.

강태준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긴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불과 몇 초 만에 그 끔찍한 추측을 뒤엎었다.

‘말도 안 돼. 둘은 친자매잖아.’

그녀는 본래 순수하고 착해서 길거리의 유기묘나 유기견에게도 유난히 다정했다. 이렇게 잔인한 짓을 저지를 리가 없었다.

그때, 강태준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자리에 있는 장정들을 개의치 않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태준 씨, 심장이 좀 안 좋은데, 오늘 밤에 와서 같이 있어 주면 안 될까요? 너무 무서워요. 나 이러다 태준 씨 아파트에서 죽는 거 아닐까요?”

맑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텅 빈 폐창고에 울려 퍼졌다. 강태준은 손목시계를 흘끗 보고 대답했다.

“알았어, 기다려.”

강 비서는 속으로 사모님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분통이 터졌다. 사모님이 그와 이혼하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좋은 여자를 얻지 못하는 건 자업자득이었다. 그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할 뿐,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몇몇 경호원들은 강태준이 떠나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물었다.

“강 대표님, 이 잡것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강태준은 다리를 들어 대문을 향해 걸어가며, 문을 나서기 전 한마디를 남겼다. “바다에 던져서 물고기 밥이나 줘.” 창고 안은 “강 대표님, 목숨만 살려주세요!”라는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강태준은 성큼성큼 문밖으로 걸어 나가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애원을 무시했다.

차에 올라 강정우에게 지시했다.

“옥룡만으로 가.”

그는 윤진아에게 가기로 약속했지만, 얼굴에는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강정우는 느릿느릿 핸들을 돌려 차를 큰길로 몰았다. 윤진아가 옥룡만에 머물기 시작한 후로, 강정우는 종종 기사 노릇을 하며 강태준을 데려다주었기에 길은 이미 익숙해서 내비게이션을 켤 필요도 없었다.

며칠 전, 그 여자가 몸이 안 좋다고 전화했을 때 강 대표님은 안절부절못하며 길 내내 빨리 가라고 재촉했었다. 강정우는 룸미러로 슬쩍 지금의 대표님을 훔쳐보았다. 그는 조용히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강정우는 더욱 서두르지 않았다. 운전은 안전이 제일이니까.

그 여자는 사장님에게 전화할 때마다 몸이 안 좋다, 죽을 것 같다는 핑계를 댔다. 강정우는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그런 ‘늑대가 나타났다’ 식의 장난을 너무 많이 치면 아무도 믿지 않게 되는 법이다. 사장님도 당연히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여전히 가주는 것은, 결국 그 여자에게 아직 관대하다는 뜻이었다.

강정우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상냥하고 현숙한 사모님을 몇 초간 안타까워했다.

차가 옥룡만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강태준은 혼자 위로 올라갔다. 그는 노크하지 않고 바로 지문을 눌러 문을 열려 했지만, 뜻밖에 잠금 해제에 실패했다.

그는 다시 비밀번호 0613을 눌렀다. 그와 김지연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 여자가 집요하게 집 안의 모든 비밀번호를 이걸로 바꾸자고 했고, 그는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편이 아니라 그러라고 내버려 두었다.

비밀번호로도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시도하려던 순간,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안에서 열렸다.

윤진아는 한껏 꾸민 모습이었다. 몸에 딱 붙는 새빨간 롱 드레스 차림이 마치 이제 막 피어나 꺾이기를 기다리는 붉은 장미 같았다.

“태준 오빠, 왔구나. 방금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았는데, 좀 쉬니까 괜찮아졌어. 지금은 정상인지 한번 만져봐.”

윤진아는 강태준의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께에 갖다 대고는, 눈웃음을 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과 눈에는 온통 기대가 가득했다.

강태준의 손이 갑자기 부드러운 곳에 닿자, 그는 전기에 감전된 듯 손을 떼어냈다.

윤진아는 다시 다가와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태준 오빠, 오늘 가지 마. 나 오빠 보고 싶었단 말이야.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토마토 비프 스튜도 끓였어. 두 시간이나 푹 끓였는데, 한 그릇 떠다 줄까?”

윤진아는 고개를 들어 키스를 조르며, 허리까지 오는 웨이브 머리를 등 뒤로 넘겼다.

강태준은 그녀의 작고 앙증맞은 귓불을 부드럽게 만졌다. 윤진아는 저도 모르게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강태준을 안 지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그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귓불에서 그의 체온이 전해지자, 그녀는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음미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온몸이 그에게 기댔다.

“태준 오빠, 태준 오빠…….”

강태준은 갑자기 손을 거두고, 손바닥을 윤진아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이 귀걸이, 언제 샀어?”

윤진아는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분명히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었는데, 화제가 갑자기 왜 귀걸이로 튄 걸까. 그녀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정말 얄미워. 왜 남의 귀걸이를 빼고 그래?”

강태준이 다시 물었다. “이 귀걸이 언제 샀냐고.”

방금보다 훨씬 더 엄격한 표정이었다.

윤진아는 아무리 그와 더 애틋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도, 그의 이런 모습에 겁을 먹고 말았다.

“왜 그렇게 무섭게 굴어. 이거 예성이가 며칠 전에 사준 거야. 아직 몇 번 껴보지도 못했는데. 돌려줘.”

그녀는 강태준의 손에서 귀걸이를 되찾아 다시 귀에 걸었다.

강태준은 그녀가 며칠 전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깊은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시간이 맞지 않았다. 그녀가 아니었다.

그는 경계를 풀고 식탁에 앉았고, 윤진아는 끓여놓은 스튜를 가져왔다.

강태준은 토마토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는 토마토와 관련된 모든 레시피를 찾아 배우고 만들었다.

“현관문 비밀번호는 왜 바꿨어?”

윤진아는 스튜 한 숟갈을 먹다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태준 오빠, 원래 비밀번호가 오빠랑 언니 결혼기념일인 거 알아. 지금 오빠가 나 혼자 이 집에 버려뒀는데, 내가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마음이 아파. 오빠는 나한테 이렇게 잔인하게 굴 수 있어?”

거기까지 말하자 그녀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내 몸만 안 좋아서 해외 치료를 받아야 했던 게 아니었다면, 우린 벌써 결혼했을 거야. 어쩌면 벌써 아기도 있었을지도 몰라. 다 내 몸이 못나서 오빠가 억지로 결혼하게 만든 거야. 하지만 괜찮아, 이제 내가 돌아왔잖아. 우리 앞날은 아직 길어. 태준 오빠, 아기 갖고 싶지 않아?”

강태준은 그녀의 몇 마디 말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진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그해에 넌 날 구하려다 심장병이 재발해서 그렇게 심해진 거잖아. 내가 너한테 빚을 진 거지.”

윤진아는 레드 와인 몇 병을 가져와 두 잔을 따랐다.

“태준 오빠, 우리 이렇게 같이 밥 먹는 게 얼마 만이야. 오빠는 올 때마다 급하게 가버리잖아. 오늘 나랑 한잔해 주면 안 돼?”

술 한 잔 정도는, 강태준도 거절할 수 없었다.

윤진아는 이 기회를 틈타 그와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릴 적 처음 만났던 일부터 시작해, 호수에 뛰어들어 그를 구했던 일을 말할 때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태준 오빠,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더라도, 난 또 물에 뛰어들어 오빠를 구할 거야. 목숨을 바쳐서라도.”

강태준의 오만한 성격은 남에게 빚지는 것을 가장 견디지 못했다. 눈앞의 작은 여자가 훌쩍거리자, 그는 저도 모르게 몇 잔 더 마셨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태준 오빠, 태준 오빠, 너무 많이 마셨어. 일은 일단 제쳐두고, 내가 해장국 끓여줄게.”

강태준은 그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는 두 손으로 눈앞의 여자의 가녀린 어깨를 잡았다.

“앞으로는 남편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왜 아직도 말을 안 들어?”

윤진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는 결국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남편.”

그녀는 요염하게 한 번 부르고는 그의 목을 감싸 안고, 발끝을 세워 자신을 그에게 바쳤다. “남편, 우리 침대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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